단토가 일상적인 것의 변용을 제목으로 쓰게 된 데는 단토의 예술철학과 부합하기에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데에 의심할 여지없이 잘 어울린다.
일상적인 것의 변용 - 아서 단토
1. 일상적인 것의 변용
사실 ‘일상적인 것의 변용’이라는 제목은 뮤리엘 스파크의 책에서 헬레나 수녀가 썼다고 언급되는 ‘일상적인 것의 변용’이라는 책에서 가져왔다.
2. 단토의 예술철학
단토가 관심 가져하는 것은 평범한 것들이 예술로 변한 것, 즉 식별 불가능한 실재의 사물과 예술의 지각적 차이가 없음에도 어떻게 예술과 일반 사물이 될 수 있느냐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3. 기존 예술의 정의
예술을 정의하는 것은 예술의 자기의식이 시작된 것이며, 정의하는 것, 이것은 철학이 할 일이었다.
그래서 예술은 어떻게 정의되고 있었을까. 예술의 정의는 게임과도 같이 계속 변화하고 새로운 것이 나오기 때문에 경계 짓기 어렵다고 인식되었다. 이후 예술계가 인정하면 예술이 된다는 예술 제도론(이전에 예술계(The artworld)에 대해 단토가 논문을 쓴 적이 있는데 예술계라는 분석을 토대로 조지 디키(George Dickie)가 예술 제도론을 확립했다.)이 있다.
4. 단토의 예술 정의
단토는 이전의 정의에 대한 생각에 반대하고 있다. 경계 짓기 어렵거나 단순히 예술로 인정하는 것들에 예술이라는 지위가 생긴다는 것을 넘어 예술의 변화에 적용이 가능한 더 포괄적인 정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이전의 정의는 지각적 범위 내에서 정의하려 했기 때문에 저런 결과를 도출했다는 것이다.
단토가 생각하는 예술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기에 식별 불가능한 실재 사물과 예술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뮤즈인 뒤샹인 줄 알았으나 워홀을 통해 이제 더 이상 굳이 예술이 미적 관조의 대상이 아님을 또한 일상의 사물과 다름이 없더라도 예술 일 수 있음에 대한 확신을 통해 그의 정의를 확립하게 된다.
5. 여담
이 유머러스한 분석 미학자는 일상적인 것의 변용 책의 서문을 통해 그의 위트를 뽐내는 글을 쓴다. 오이디푸스를 빌려와 조지 디키를 자신의 자식으로 빗대 이야기하길, ‘항상 자식은 뜻대로 크는 법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적인 오이디푸스적 방식대로 나는 나의 자식과 싸우지 않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조디 디키의 예술 제도론이 단토의 예술계라는 논문을 통해 확립된 것이니 디키가 단토의 철학적 승계처럼 보이고 자식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이지만, 엄연히 단토는 디키와는 방향이 다르기에 그에 대항하는 철학을 펼쳐야 하기 때문이다.
단토가 덧붙여 말하길, ‘나의 예술 철학이 내가 낳은 것으로 알려진 자식에게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한다.
6. 아서 단토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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